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만주 전략 공세 작전 (문단 편집) === [[진주만 공습]] 전까지 관동군 작전계획 === 아래의 내용은 대미개전 전까지 소만국경상의 국경요새와 관동군 작전계획으로 원문은 [[http://transoxiana.egloos.com/3741204|여기]]에 있다.[[https://archive.is/pTAXQ|아카이브]] 링크 소실을 대비해서 개략적인 내용을 본문에 추가한다. || [[파일:attachment/manfort1935.jpg|width=100%]] || || 쇼와 10년(1935년)이후 관동군 작전계획과 소만국경상의 일본군 국경요새 || 1933년부터 작성되기 시작한 구 일본 육군 관동군의 XX년도 작전계획은 대소 작전계획으로, XX는 매년 갱신되는 년도다. 당연하게도 전장을 소련 영내로 상정, 우선 동부 만소국경, 그러니까 [[동가강]]이나 [[목단강]] 방면부터 소련령 [[연해주]]를 급속 침공해 보로실로프나 [[블라디보스토크]] 주변의 극동 소련군 지상전력과 항공전력을 격멸한 후, 개전 이후는 지구전으로 버티고 있던 서부국경, 그러니까 지도의 다싱안링 산맥 이서나 외몽고 방면에서 2차 공세를 발동해 소련군에 연속적인 결전을 강요, 이것으로 잔존 극동 소련군을 격파한 후 최종적으로는 [[바이칼호]] 방면으로 진격한다라는 것이었다. 연해주를 먼저 침공하는 동부 국경 정면의 공세 발동은 동원 개시로부터 약 2개월 후부터 시작하는 것이 상정되어 있었는데, 관동군의 작전계획에서는 통상 2개월 이내에 완료하는 것으로 전망되고 있었다. 이 동부 소만국경에서의 제1기 회전과 서부 정면에서의 제2기 회전(호롬바일 평원에서 결전), 바이칼 호수 방면으로 진격이라는 패턴은 1936년도 작전계획까지 주욱 인계된다. 관동군의 대소 작전계획은 기동전과 우회, 포위, 연속적인 결전으로 이어지는 시나리오인데 메이지 이후 일본 육군 대륙작전의 전형이라고 말해도 좋은 작전계획이었다. 다시 한번 정리하면 우선 개전과 동시에 전력을 다해 동부 국경쪽에서부터(보로실로프-블라디보스토크-이만 등 연해주지역의 주요 도시 공략과 우수리 강 도하작전) 항공 격멸전을 먼저 실시해 제공권을 확보, 이후 지상군 주력(약 10~11개 사단)이 동부 소만국경을 돌파해 공세를 걸어 연해주 소재의 소련 극동군을 격파한다는게 최초의 상정 목표였다. 이 동부국경에서의 공세 발동과 동시에 일본군이 북정면이라고 호칭한 흑하방면의 북부 만소국경에서도 양동작전(4개 사단 투입)을 실시해 소만국경 인근 [[시베리아 철도]]를 분단시켜 소련군의 보급과 신속증원을 저지한다. 해당 작전은 1935년도 작전계획부터 반영된다. 이와 함께 동쪽 정면의 작전 성공 후에는 여기서 6개 사단 정도를 병력을 서정면으로, 대흥안령 산맥 이서의 서부 소만국경, 즉 하이라얼 방면 전용, [[조선군(일본제국)]]과 내지에서 증파된 병력이 만주에 전개하면 최종적으로 약 18개 사단의 전력으로 호롬바일 평원에서 소련군 주력에 결전을 시도, 이것을 격파한 후 바이칼 호수 부근까지 진격한다라는 시나리오였다. 하지만 관동군의 정세 판단에 의하면 소련군의 진짜 주력은 개전과 동시에 서부정면에서, 그러니까 하일라얼 방면에서 역공세를 발동할 확률이 대단히 높기에 만약 서전에서 동정면의 공세가 실패한다면 관동군의 이 시나리오는 파탄, 전 전선의 붕괴를 의미했다. 또한 동정면의 공세가 성공할 때까지 서정면, 대흥안령 이서 일본군의 최대 전략거점인 하일라얼 요새에서 일본군 제8 국경수비대가 전선을 지탱해 낼 수 있는지의 여부가 작전계획의 가장 중요한 포인트였다. 때문에 일본군이 소만국경상의 요새 중에서도 가장 철저하게 요새화한 곳이 바로 호롬바일 평원 인근의 하일라얼 요새였다. 이곳의 별명은 호롬바일 평원을 지키는 '''오망성'''으로, 하일라얼 요새는 반지하 매립식의 거대 [[성형 요새]]였다. [[파일:attachment/manfort1941.jpg]] 쇼와 16년(1941년) 이후 관동군 작전계획과 국경요새 하지만 이후 동서 2정면에서의 공세 패턴이 전면 재검토된 것은 1937년도 대소 작전계획부터였다. 이후에는 서정면 결전은 단념, 동정면 결전만이 주로 지향되게 되었기 때문이다. 때문에 연해주를 노리는 동정면의 작전발동에서는 대공세 전의 초동 작전이 설정되었다. 이것의 요점은 미리 국경지대에 전개시켜둔 기습 병력에 의해 송곳으로 후벼파듯 동부 국경, 극동소련군 연해주 방면군의 소련군 거점의 취약지점을 돌파, 극동 소련군을 교란해 소련군의 대규모 역공세 발동을 최대한 저지하는 것을 노렸다. 그리고 이 초동작전이 성공하면, 즉각 주력 공세[* 15개 사단을 기간으로 동원한 병력]를 실시해 한꺼번에 연해주 방면의 소련군을 격멸한다라는 작전으로 바뀌게 된다. 그럼 다싱안링 이서 서정면에서의 결전은 어떻게 되었나? 당연히 실시하지 않고 이쪽은 시종 지구전으로 돌아서 그 후의 진격도 단념되었다. 그래서 하이라얼 요새의 대규모 증강/개축도 37년 이후가 되었다. 당연하다면 당연한 얘기지만 관동군의 대소 작전계획이 이렇게 최초 시안에 비해 소극적으로 돌아선 것은 바로 병력 부족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 1937년도 작전계획은 그 후 북쪽 정면에 대한, 그러니까 흑하 방면, 브라고베시첸스크 공략으로 시베리아 철도 절단 공세안이 좀 더 비중있게 바뀌는 등 약간의 변화는 있었지만 기본적으로는 1940년도 작전계획까지 인계되었다. 허나, 이러한 작전안의 소극적 수정에도 불구하고 1935년 이후 극동 소련군 강화에 수반하는 기성 대소 작전계획의 붕괴를 두려워한 [[일본 육군]]도 1937년 이후부터는 관동군의 증강에 나서게 된다. 1937년부터 관동군은 그때까지의 4개 사단(+독립수비대 5개 대대) 편제에서 6개 사단으로 증강되었고 이듬해인 38년에는 2배인 8개 사단, 40년에는 12개 사단으로 계속 증강되었다. 그리고, 부대의 전개양상도 대폭 변화되었다. 1937년까지는 사단급 이상의 전략군단은 도시 주변에 전개하고 있었지만 1938년 이후는 소만국경 부근으로 대거 이동하게 되었다. 실례로 1937년까지는 국경 인접지구에 대한 사단 배치는 불과 2개 사단 뿐이었지만 1938년부터는 무려 5개 사단으로 증강되고 있었다. 이것은 관동군이 반만/항일세력에 대한 무력 진압을 이후부터는 기본적으로 독립수비대나 만주국군, 만주국 경찰 등에 맡긴 것을 의미했고 관동군 자신은 철저히 대소전 준비에 전념하기 시작한 것을 의미하고 있다. 또한 1938년 말에는 8개의 대규모 국경 요새가 새로이 완성, 관동군에 배속된 사단과는 별도로 약 2만 명의 병력이 국경지대의 거점에 항시 전개하게 되었다. [[파일:attachment/manfort410g.jpg]] 후터우(虎頭) 요새의 41센티(16인치) 열차포 서정면의 하일라얼 요새와 동정면의 동녕 요새, 후터우 요새, 그리고 북정면의 아이훈 요새는 특히나 견고한 요새로 평가되었는데 평시에도 3,000~6,000명 이상의 국경수비대를 수용하는 대규모였으며 최대 3m의 콘크리트로 방어된 영구 축성진지였다. 또한 동정면과(후터우 요새) 북정면의(아이훈 요새) 국경요새는 방어만이 아니고 공세작전 거점으로서의 역할도 담당하고 있다는 점이 특징이었다. 왜냐면 이 요새들에는 24cm 유탄포나 30cm 유탄포, 그리고 41cm 열차포 등 [[일본 육군]]으로서는 예외적인 대형의 장거리 중포를 다수 장비하고 있어 대소전의 초두에 아웃레인지 포격으로 소련측 군사시설, 철도, 철교를 파괴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었다. [[노구교 사건]]과 제2차 상해사변으로 [[중일전쟁]]이 발발하고(1937년 이후), 전선의 확대로 본격적인 동원이 개시되어 일본군은 가파른 병력 증가 추세로 돌아서게 된다. 허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성적인 병력 부족에 시달리던 [[일본 육군]]은 중국 전선에서 여전히 골치를 썩이고 있었건만 관동군으로부터의 대규모 병력 전용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뿐만 아니라 일본 육군은 관동군에는 정예부대라고 평가되던 전통있는 상설사단을 우선 배치, 중국전선에는 급조한 특설 사단만을 보냈다. 이것은 육군이 얼마나 대소전 준비를 중시하고 있었는지를 잘 보여주는 한 예라고 할 수 있겠다. 또한 항공전력도 동정면으로 집중 배치되었지만 전력 부족으로부터 만약 실제로 대소전을 실시할 때는 해군 항공부대의 지원을 받게 되어 있었다. [[태평양 전쟁]] 개전시 기준으로, 그러니까 41년 말 기준으로 일본 육군의 동원병력은 총 60개 사단 약 210만 명이었다. 이중 [[남방작전]] 전체에 투입된 부대는 불과 13개 사단 30만 명, 나머지는 만주에 24개 사단 110만 명과 중국에 30개 사단 65만 명에 전개중이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